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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입니다(주임신부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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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초동성당
댓글 0건 조회 1,996회 작성일 14-08-1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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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입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드디어 오는 14-18 4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십니다. 아쉽게


교황님을 직접 만날 수 없고 언론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할 수 밖에 없겠지만, 교황님의 행보


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복되시는 124위 순교자, 뿐만 아니라 103위 성인의 신앙을 공경하고,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우리가 순교 영성을 배워 익혀 생활 속에서 잘 실천해야 하겠


습니다.


   시복(諡福)이란 교회에서 성덕이나 순교로 인해 이름 높은 이에게 복자라는 칭호를 주어 특정


교구, 국가 내에서 공적으로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교황의 선언을 뜻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시복식은 두 차례 열린 바 있습니다. 기해박해(1839)병오박해(1846) 순교


79위의 시복식이 1925 7 5, 병인박해(1866) 순교자 24위의 시복식이 1968 10 6


에 각각 열렸습니다.


   두 차례 모두 시복식 장소는 로마였습니다. 이들은 1984 5 6일 서울 여의도에서 성 요한 바


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諡聖)돼 한국교회는 103위 성인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에 시복되시는 124위를 비롯한 103위 성인은 모두 순교자입니다. 순교란 무엇입니까?


교는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침’,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하는 일을 뜻합니다. 이 정의


에 의거해서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은 사목활동을 하다 과로와 병환으로 선종함으로써 시복 되지


않고 증거자’, 혹은 땀의 순교자’, ‘백색 순교자로 호칭하면서 공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124위 순교자 가운데 윤지충 (바오로)이 왜 대표자처럼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입니까?


지충은 1791 12 8일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한국교회 최초의 순


교자이기 때문입니다.


   124위 가운데 기해박해 이전의 순교자가 86위로 주로 초기 순교자가 중심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해·병오·병인박해 순교자인 103위 성인보다 먼저 순교하고도 왜 시복은 더 늦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동시에 조선에 진출한 파리외방전교회가 자신들이 조선교


회의 사목을 책임진 이후의 순교자에 대해서만 시복 시성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교


회가 시성식 이후에 103성인의 부모나 조부모에 해당하는 순교자의 시복 시성을 독자적으로


추진해온 끝에 그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816, 한여름 무더위와 교통체증, 안전 등이 염려됨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내 한복판 광화


에서 왜 시복식을 거행하는 것입니까? 광화문은 조선시대 조정의 중심으로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포도청(捕盜聽) 중앙관청이 모여 있던 곳입니다. 또한 최대 순교터인 서소문 순교


성지도 인근에 위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광화문 일대는 박해의 진원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학(邪學) 죄수로 온갖 천대와 핍박을 받고 결국에는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 124위가 광


화문에서 영광스런 복자품에 오른다는 것은 순교자들이 비록 온갖 고통을 겪었지만 그 고통을 통


해서 마침내 영광을 차지한다는 부활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24위 순교자의 연령대를 보면 10 5, 20 15, 30대와 40대가 21, 50 19, 60


11, 70 5위로 30~40대가 가장 많습니다. 연령(출생년도) 미상도 27위나 됩니다. 최연소자는


12세인 이봉금(아나스타시아), 최고령자는 75세의 김진후(비오)입니다. 김진후는 성 김대건(안드


레아) 신부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124위 중 성직자는 중국 출신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유일하며 동시에 유일한 외국인이고, 나머


123위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그분들의 신분을 보면, 양반은 물론이고 중인, 역관(譯官), 천민


등 다양하였습니다.


   놀라운 점은, 여성은 25위에 비해 남성이 99위로서 신앙에 대해 관심이 높았고, 무엇보다도


30-40대의 신앙의 열정이 그 어느 세대보다 크질 않았습니까? 왜 그러하였겠습니까?


   달레의 천주교회사’를 보면, 황일광(黃日光 시, 1757-1802)이라는 백정 출신 천민 이야기가 나옵니다. 황일광이 세례를 받고 처음 신자들 모임에 갔을 때, 양반들이 자신의 옷소매를 끌며 어서 올라오라며 환영했습니다. 천민은 감히 양반의 대들보 위에 오를 수 없는 시대였기에 황일광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이 어떻든 서로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황일광은 그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천주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


당 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게는 천당이 두 곳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가 천당이고 죽어서 갈


곳도 천당입니다.


   또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보면, “누가 배고파하면 먹여주고 목말라 하면 물을


주고, 집이 없으면 재워주고, 우환이 있으면 위로해주고, 어리석으면 가르쳐주고, 죄를 지으려 하


면 올바른 말로 말리고, 우리를 모욕해도 용서해주고, 죽으면 장사 지내 주고 그를 위해 대신 기


도해주, 또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느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당시 신자들은 이렇게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함으로써 서로 사랑해야 한다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형제애를 받아들여 몸소 실천하면서 조선의 신분제도를 타파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특히 젊은 세대들이 천주교에 대한 관심과 신앙의 열정을 가졌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박해 속에 복음을 실천하고 마침내 순교로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 얼마나 위대합니


? 그럼에도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가 순교 영성을 배워 익혀 생활 속에서 잘 실천하고 있습니


?


     순교 영성이란 물질보다는 정신, 육체보다는 영혼, 현세보다는 내세, 래 사는 것보다는 영원


히 사는 것을 추구하는 영성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 순교 영성이 살아 있습니까? 오히려


약화되거나 단절되어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 역사를 보면, 윤지충이 순교한 1791년의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신유박해(1801),


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 등 크고 작은 박해는 상시적으로 지속되었


습니다.


   1866 2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의 체포로 공식적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8000명 이상이 순


교한 최대의 박해이면서 마지막 박해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병인박해는 1873 12 24


일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고흥선대원군이 물러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그 후 조선과 프랑스가 1886년 맺은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자유


가 주어지면서 선교사들의 수가 늘어났고, 그 당시 신자수는 박해 이전의 신자수 2만 명을 회복했


습니다.


   1895년에는 조선대목구 제8대 대목구장인 뮈텔 주교가 고종을 만나 고종으로부터 병인박해에


대한 유감의 뜻을 전달 받으면서 신앙의 자유를 공인 받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진 신앙


의 자유는 1899교민조약으로 법적인 확인을 받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1886년 조불조약으로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격상되면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박해시대에 향유하지 못했던 성사 중심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성직자에 의지하는


수동적, 형식적 신앙으로 흘러갔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한 또 다른 박해를 두려워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일본 총독부의


통치에 순응하고 협조하면서 세속화의 길을 걸었고 한국교회의 순교 영성은 더욱 자취를 감췄습


니다.


   그 이후 민족 해방과 6.25전쟁, 경제 발전 등을 겪으면서 한국교회는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물량주의, 업적주의, 금전만능주의 등 세속적 가치에 오염됨으로써 순교 영성이 약화되고 형식화


되질 않았습니까?


   성지를 개발하고 기념관을 세우고 성지순례는 하지만, 순교 영성을 제대로 배워 익히고 생활하


는데 미흡하지 않은지? 깊이 반성해야 하겠고, 라서 124위 시복식을 계기로 순교 영성을 되살


려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독일 주교회의는 올해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파괴적인 이기주의를 극복하자


호소하며 1600만 명의 희생자를 낸 1차 세계대전에 교회도 책임이 있다고 시인했습니다.


   “1914년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국가적 경쟁은 유럽의 경제 협력을 파괴했고 이전에는 상상


할 수 없는 국제적 충돌을 야기해 세계대전 중 독가스와 대량 살상 무기가 사용됐다고 밝히면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가담한 것도 사


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독일 주교회의가 교회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 고백하였듯이 한국 교회 역시 신앙의 자


유를 획득한 이후 특히 일제 시대와 현대사에서 복음의 입각하여 생활하지 못함으로써 저지른 과


거의 잘못들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겠


습니까?


   신학자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현대적 순교개념을 그리스도교적인 동기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위해, 자유를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 투신하고 목숨을 바치는 것 또한 순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올바른 방향 제시, 공정한 경제발전을 위한 가르침, 사회적 불평등의 척결,


약자의 우선적 선택과 존중, 문화적 소외지대 척결과 편견 극복을 위한 노력을 통해 순교 영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생활해야 할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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