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주교가 미안하다고 하는 이유(스토리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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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나는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같은 학년에 베트남에서 온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몸집은 작지만 대체로 싹싹하고 친절한 성격의 학생들이었다. 지금도 머리에 떠오르는 한 친구는 말수는 적었지만, 온몸에서 선함이 묻어 나오는 아주 겸손한 청년이었다. 가끔씩 던지는 한마디는 깊이 생각한 다음에 발하는 의미심장한 말 같았고, 같은 또래지만 마음속으로부터 존경심이 생기는 그런 친구였다.
4년 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귀국 후 풍문에 들으니 베트남 친구들은 고국 땅이 혼란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유럽 여러 나라로 각각 흩어졌다고 들었다. 1975년 전쟁이 종료되고 북베트남 공산정권이 통일을 이루었고, 해외에 있던 남베트남 사람들은 귀국길이 완전히 막혀 국제 미아처럼 되었고 각자 여러 나라에 흩어져 난민으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함께 수학했던 친구들의 나라 잃은 설움과 막막함을 상상하며 그들의 앞날이 얼마나 황망할지 깊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천주교의 모든 이들을 대표하여 베트남에 왔습니다. 베트남에 온 기회에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한국군이 과거 베트남전쟁에서 베트남 국민들에게 많은 아픔을 드려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한국 군인들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고 잔혹한 행위를 통하여 베트남 민간인들, 힘없는 노인과 여성과 어린아이들까지 목숨을 빼앗아간 것에 대해서 어떻게 용서를 청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12년 동안 가슴 속에 묵혔던 말이었다.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사실, 고개를 제대로 쳐들 수가 없었다. 한국 정부도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았고, 아니 베트남 피해자들의 아픔을 가장 먼저 공감하고 용서를 청했어야 할 우리 종교인들도 40여년이 지나도록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관심한 세월을 보내며 잊어버리고 살아왔음에 부끄러움이 솟아오를 뿐이었다. 뭐라고 말한들 사과가 될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한국인들 중에는 이런 역사를 인지하고 있고, 깊은 죄책감과 속죄의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베트남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런 심정으로 발언한 뒤 휴식 시간이 되었다. 베트남 주교들과 인도네시아, 타이 등 여러 아시아 국가의 주교들이 나를 개별적으로 찾아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
제주 4.3이 발발한 지 내년이면 70년이다. 그런데 66년이 지난 2014년에야 비로소 한국 정부는 4월 3일을 제주 4.3 국가추념일로 정했다. 그래도 아직 그때의 아픔과 원한이 씻어지지 않고 많은 제주인들의 가슴 밑바닥에 깊은 상처로 자리잡고 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42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사실 가해자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지금까지 제대로 책임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진심으로 용서를 청한 책임자도 없었다. 우리가 베트남 전쟁 희생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는 한,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저지른 일본 국가의 범죄에 대해 우리가 벌이는 비판과 규탄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아 질문해 본다. 한베평화재단은 화해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1년 동안 준비하고 고민했다. 내년 2월이면 베트남의 꽝남성 지역에서 한국군이 지나간 자리가 온통 죽음으로 채워진 지 50년이 된다. 그들의 마음의 상처를 함께 나누고자, 피해 지역에 조화를 보내고 제사 지원금을 보낸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고 정확하게 바라보고자 내년 4월 베트남민간인학살 문제를 바라보는 시민평화법정을 연다.
그 발걸음에 마음과 발걸음을 모아주시길 기도해본다.
2017년 12월 7일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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