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 성지순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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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차영애 데보라
이른 아침, 스페인 톨레도에서 대 데레사 성녀의 고향인 아빌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2시간 남짓 소요되는 버스 안에는 김용주 마태오 신부님을 위시해 서초동 성당 신자와 생활 성가 가수 겸 가이드인 막시모 형제님 등 30여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나에게 아침기도와 순례자의 기도를 바칠 은혜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마이크를 잡고 기도하기는 처음이기에 긴장한 탓으로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이 또한 감사한 마음이었다. 곧바로 두 신자도 5단 묵주기도를 올리며 하루가 시작됐다.
스페인 아빌라, ‘라 산타 La Santa’라 불리는 생가 성당은 성녀 데레사(1515~1582)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생가터에는 성녀를 기념해서 건립한 성당과 맨발의 카르멜 수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곳은 성녀의 발자취를 따라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아빌라 대 데레사 생가 성당에서 마태오 신부님의 미사는 성령이 충만했으며, 신자들과 함께한 그 은총의 시간은 마음 깊이 와 닿았다. 박물관 내부에는 성녀 데레사의 일생에서 중요한 각종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집필한 자서전 등 주요 서적과 서한 그리고 여러 생필품이 있었다. 그중에서 나의 시선을 끈 것은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굵직한 나무토막 베개였다. 투박한 형태는 내가 어릴 적 보았던 갈색을 띤 반지레한 목침보다 서너 배 정도는 더 굵고 길어 보였다. 틈이 벌어진 모양은 세월의 흐름으로 생길 수 있을 터이지만, 거칠고 볼품없는 생김새는 고행으로 보낸 삶의 나날을 의미하는 듯했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읜 데레사는 성모상 앞에 꿇어 눈물을 흘리며 성모님이 대신 자신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했다. 19세에는 마침내 수녀가 될 것을 결심하고 아빌라에 있는 카르멜 수녀회에 입회했다. 병고와 회의, 자기 질책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서서히 기도와 관상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엄격한 맨발의 카르멜회를 창설하면서 1562년 아빌라의 성 요셉 수도원을 시작으로 스페인 전역에 17개의 남녀 수도원을 세웠다. 데레사 성녀는 자서전인 『천주 자비의 글』을 비롯해 수많은 편지와 책을 남겼다.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며 자신의 몸을 가장 낮추어 인류애에 대한 희망을 준 사람, 끊임없는 자기의 희생으로 각박한 현대 인류사에 빛나는 정신을 보여준 그가 ‘大 데레사 성녀’이다.
스페인 전역을 돌며 수도회 개혁을 주도한 성녀는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은 위대한 신비가 이고 교회 학자였다. 하느님의 딸로 살고자 했던 성녀 데레사의 정신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세계 곳곳에 큰 울림으로 퍼지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영적 쇄신을 이끈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고향을 다녀오며 거룩한 성녀의 발자취를 신심으로 느껴 보았다.
해외 성지순례를 허락하시고 무사히 다녀오도록 강복해 주신 주임 신부님과 순례지 성당에서 매일 미사로 은혜의 나날과 안전을 기도하신 보좌 신부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음으로 양으로 봉사하신 사목회 임원님들의 정성과 노고에 고마움을 표한다. 생활 성가 가수이며 가이드인 막시모 형제님의 찬미가는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2024년 10월에 여행 시작하던 날, 얼굴이 익숙하지 않아 서먹했다, 순례지마다 신부님의 은혜로운 강론으로 한마음이 되어 미사를 올리며,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니 올 때쯤에 우리는 한결 친밀감을 느꼈다. 모두 감사하며, 그때의 추억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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