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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리 준본당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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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ta
댓글 0건 조회 1,839회 작성일 20-06-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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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본당 설립 이전의 지역 교회
 복음의 전래와 서리풀 공소

 

- 서초동 지역의 복음 전래

 

2) 잠실리 준본당의 설립


해방 후 명달리(일명 명도리)에 강당이 건립될 무렵, 대촌(엄나무골)과 장안말 지역에 50여호, 명달리 지역에 55여 호, 방배리 쪽에 60호 정도가 있었으며, 이중 신자들은 50명 정도로 대부분 명달리와 방배리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강남 지역의 공소 신자들은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약현 본당의 주임 신부로 있던 이우철 시몬 신부가 시흥군의 잠실리에 정착한다는 것이었다.


이우철 신부는 약현 본당에 재임할 때부터 서울역 인근에 버려져 있는 어린이들을 돌보면서 이들을 구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1947년에 이르러 약현 본당 신부를 사임하고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당시 잠실리 13번지 5호:지금의 서초구 잠원동)에 성심원(聖心圓)이란 보육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 신부는 이해 7월 15일 자로 성심원을 개원하고, 그 안에 조그만 소성당을 건립하여 문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잠실리 준본당"의 시작이었다.


잠실리 준본당(현 잠원동 본당의 전신)은 그 후 자연스럽게 본당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전까지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중림동이나 혜화동 본당의 미사에 참여해야 했던 강남 지역 신자들에게는 이곳이 아주 중요한 복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제 이 일대의 신자들은 한강을 건너지 않고서도 목자가 상주하는 보육원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이우철 신부는 강남 지역의 서초리·방배리·양재리·반포리·잠실리·청담리·신사리 등에 거주하는 신자들을 위해 순회 미사를 집전해 주거나 춘추 판공성사를 맡아 주었다.

 

3) 잠실리 준본당의 변모


잠실리 본당의 성당과 성심원은 6·25사변을 겪으면서 모두 파괴되었다. 이에 이우철 신부는 휴전 후 성당 재건에 힘써 1954년 7월 18일에는 미군의 도움으로 성당 및 보육원을 완공, 낙성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무렵 잠실리 본당의 신자 수는 700명 정도로 증가하였는데, 이중에는 전쟁 후 외국의 구호 물자가 들어오고 천주교회에서 이를 분배해 주면서 입교한 신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잠실리 본당은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우철 신부가 본당 일보다는 보육원 사업에 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또 1963년 1월 1일, 이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영등포구 신동출장소 지역이 된 이후 신자들의 이주가 계속되었으며, 새로 이주해 온 신자들은 잠실리 본당에 나오는 대신 이전의 본당 - 명동이나 중림동, 혜화동 본당 - 미사에 참여하는 실정이 되었다. 그 결과 잠실리 본당은 다시 준본당으로 격하되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서초리 공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의석 회장이 구호 물자를 나누어주면서 마을의 외교인들이 많이 입교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일시적으로 예비신자를 포함하여 총 신자수가 70명 정도로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방배리에 따로 공소집이 이루어진 후 그곳 신자들이 서초리 공소를 나오지 않으면서 공소의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공소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1964년에 이르러 양재동에 성당 부지 매입 문제가 거론되면서 마침내 강당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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