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극동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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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장하는 극동 공소
이처럼 공소를 여러 차례 이전하는 가운데서도 신자들의 복음 자리는 끊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앙 면에서는 깊이를 더해 가게 되었다. 당시 미사 준비를 하고 신자들의 교적을 정리하며 본당 교적부에 올려주던 오중근(요한) 형제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공소의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여 1978년 말에는 약 100명 가까이 되었고, 공소 예절에 참여하는 숫자도 7, 8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첫영성체와 주일학교 개설
한편 신자들은 반포 본당의 활도에 참여하거나 나름대로 신심 활동을 모색하고, 어린이들의 교리 교육이나 이웃 전교에고 관심을 잃지 않았다. 특히 어린이들 위한 교리 교육은 공소 설립 당시부터 꾸준히 시행되어 온 것으로 여느 공소에서 볼 수 없던 특유의 활동이었다. 그러나 서초동 공소 신자들 가운데는 교사 활동을 할 만한 젊은층이 없었기 때문에 반포 본당에서 계속 주일마다 교사를 보내 주었다.
이와 같은 노력 속에서 '미술학원' 공소집 시절인 1977년 8월 10일에는 어린이 5명이 극동 공소 최초로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신자들 사이에서 '정식으로 주일학교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대두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공소집을 이리 저리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정식으로 "서초동 주일학교"가 개설된 것은 1978년 10월 1일이었다. 이보다 열흘 전에 태권도장 공소집을 마련한 신자들이 '이제 주일학교를 개설해도 좋겠다'고 의견의 일치를 본 결과였다.
이 공소 주일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수는 30명이었는데 교사는 그 이전부터 어린이 교리를 담당해 온 반포 본당의 최 안나와 이 헬레나가 맡았다. 그러다가 이들이 개인 사정으로 더 이상 교사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1980년 4월 1일부터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소속인 박창화(비안네) 수녀와 김 막달레나 자매가 함께 주일학교 운영과 지도를 맡게 되었다. 그 후 공소 주일학교는 착실히 운영되어 이해 8월 10일에는 학생 중 14명이 새로 첫 영성체를 하였고, 그중 3명은 세례성사를 받았다.
레지오 마리애의 도입
한편, 극동 공소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신심 단체를 조직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공소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함께 전교 활동이나 봉사 활동을 하였지만,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점차 효과적인 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단체의 결성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당의 박병윤 신부도 공소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고, 본당의 레지오 회합에 몇몇 공소 신자들을 초청해 주었다.
본당의 회합에 참석하고 온 신자들은 즉시 공소에서 모임을 갖고 우선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그 결과 1980년 9월 10일에는 마침내 15명 정도의 회원을 모집하여 "성모 영보 Pr."을 창단 하였고, 그 초대 단장에 손영화(안나), 부단장에 김정자(세실리아)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1981년 7월 1일에는 양재동 본당의 "천사들의 모후 Cu."로부터 승인을 받게 되었다.
이후 "성모 영보 Pr."단원들은 매주일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지면서 신심·봉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공소의 궂은 일은 언제나 그들 몫이었고, 새 신자들을 찾아내거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모든 회원들이 열심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주일이면 미사 준비나 제의 ·성작포 정리와 세탁 등을 도맡아 하였고, 훗날 공소 강당이 마련된 뒤부터는 축일 행사 준비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준본당 시절에는 성물 판매나 불우 이웃 봉사 등으로 그 활동을 확대해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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