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 관할 구역 · 반의 개편
페이지 정보
본문
- ▣ 서초동 본당의 설립과 정착
▶ 서초동 본당의 설립 |
2. 구역 · 반 개편과 교세의 확대
1) 본당 관할 구역 · 반의 개편
· 초기의 본당 구역
설립 당시 서초동 본당의 관할 구역은 서초 1동 일부와 2동 전체를 일원으로하는 지역으로 여기에는 일반 주택 단지가 얼마간 있을 뿐이고 대부분 아파트 단지였다.
그러나 남쪽으로는 양재동 본당과, 북쪽으로는 반포 본당과의 관할 구역 경계 때문에 일부 아파트 단지는 편리함과 관계없이 소속 본당이 확정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서초동 본당 관할 구역 안으로 신동아 아파트 1~4동, 우성 아파트 13~32동과, 진흥·은하·삼익·금호·삼호·한일·동신·서초 삼익 아파트 전체가 편입되었다.
이에 본당에서는 1983년 1월 13일에 '관할 구역 재조정'을 요청하는 공문(서초 83-1호)을 교구에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양재동 본당 관할 지역으로 되어 있는 우성 아파트 1~12동, 무지개 아파트, 신동아 아파트 5~8동 등을 신자들의 편의에 따라 서초동 본당에 편입시켜 주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 중 약 90세대는 관할 구역에 관계없이 서초동 본당의 미사에 참여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자 대부분이 이처럼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본당의 구역·반 편성도 자연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즉 1981년 11월 26일 처음 구역장을 임명할 때 본당의 전 지역을 모두 "12개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때의 현황을 보면 1구역(진흥 아파트), 2구역(삼호 아파트), 3구역(삼익 아파트), 4구역(극동 아파트), 5구역(금호 아파트), 6구역(우성 아파트), 7구역(서초 일반), 8구역(동신 아파트), 9구역(한일 아파트), 10구역(서초 삼익 아파트), 11구역(신동아 아파트), 12구역(구역 외) 등이었다.
· 관할 구역의 변모와 구역· 반 개편
이와 같은 본당의 관할 구역에 처음 변화가 있게 된 것은 1983년 3월 1일이었다. 처음의 관할 구역 구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오던 김유종 신부와 반포 본당의 김영일(발다살) 신부가 서로 협의하여 관할 구역을 조정하기로 하고, 교구의 승낙을 얻어 이를 확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포 본당 관할 아래에 있던 반포동의 삼호가든 아파트, (서초)한양 아파트 지역이 서초동 본당 관할로 변경되었는데, 여기에 사는 신자수는 79세대에 258명이었다. 이에 본당에서는 새로 편입한 신자들의 환영식을 3월 27일자로 열고, 이날 특별 미사를 봉헌한 뒤 '태양의 아들과 딸들'이라는 영화를 상영하였다.
반포 본당에서 새 아파트 단지가 편입됨에 따라 본당에서는 기존의 구역·반을 개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1983년 말에는 기존의 12개 구역을 모두"20개 구역"으로 확대하여 우선 '반포동'은 1구역(삼호가든 아파트 1·2차), 2구역(삼호가든 아파트 3차), 3구역(삼호가든 아파트 4차), 4구역(한양 아파트) 등 4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다음으로'서초 4동' 지역은 5구역(삼호 아파트 1지역), 6구역(삼호 아파트 2지역), 7구역(삼익 아파트), 8구역(진흥 아파트), 9구역(서초 삼익 아파트), 10구역(극동 아파트), 1구역(금호 아파트) 등 7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이와 함께 '서초 2동' 지역은 12구역(신동아 아파트 1지역), 13구역(신동아 아파트 2지역), 14구역(우성 아파트)과 20구역(무지개 아파트) 등 4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서초 1동'과 '서초 3동'지역은 15구역(일반 1지역), 16구역(일반 2지역), 17구역(일반 3지역), 18구역(일반 4지역), 19구역(일반 5지역)등 5개 구역으로 나누게 되었다.
이후 본당의 사목 관할 구역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본당 설립 이후 계속 신자수가 증가하고 있었고, 관할 구역 안에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가 많았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구역 개편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그중 가장 먼저 서초 일반의 3구역과 4구역이 너무 넓다는 의견에 따라 1984년 12월 8일자로 이 구역에서 일반 지역 6구역과 7구역(동신 아파트, 산성 단지 일대)을 분리하였는데, 이로써 본당은 모두 "22개 구역"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2) 전교 활동과 교세의 확대
사실 본당의 관할 구역 개편과 확대는 본당의 교세가 증가한 데 또 하나의 원인이 있었다. 실제로 신자들의 전교 활도 결과 새 영세자들이 탄생하고, 새 아파트 완공으로 입주가 이루어지면서 본당의 교세는 눈에 뛸 정도로 확대되었다.
우선 총 신자수를 보면, 본당 설립 당시에는 총 261세대에 863명으로 전체인구 5만 명에 비해 0.17%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러던 것이 1981년 말에는 481세대에 1,593명(남 689명, 여 903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675세대 2,397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1983년 말까지는 세대수만도 997세대가 되었고, 총 신자수는 3,643명을 헤아리게 됨으로써 전체 인구 6만 2천 명에 비해 신자 점유율이 5.9%에 이르게 되었다. 1983년에 특히 교세가 크게 증가한 이유는 이해 3월 1일에 있었던 반포 관할 지역의 편입 때문이었다.
본당의 교세는 1984년에 들어 다시 한번 증가하였다. 서초 일반 주택에 거주하는 신자수가 늘어난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해 말의 교세는 총 1,605세대에 4,73 2,032명, 여 2,702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지역 인구 대비 신자 점유율은 6.3%에 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늘어난 본당의 신자 세대수는 현재의 성당 부지를 새로 매입하도록 결정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다음으로 새로 전입해 오는 신자들은 1981년에 304명에 지나지 않았는 데 비해, 1982년에는 552명, 1983년에는 1,121명, 1984년에는 848명(남 343명, 여505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와 함께 새로 영세하는 신자들도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이러한 현상도 교세 확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즉 1981년에는 새로 영세한 신자가 288명이었지만, 1982년에는 306명, 1983년에는 377명, 1984년에는 570명(남 225명, 여 345명)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 이전글현 성전 부지의 매입과 교세의 확대 20.06.23
- 다음글주일학교와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 20.06.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