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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본당의 설정 - 공소 강당 마련과 준본당 설정 - 공소 강당 마련과 준본당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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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ta
댓글 0건 조회 1,216회 작성일 20-06-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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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본당 설립 이전의 지역 교회
 복음의 전래와 서리풀 공소

 

준 본당의 설정 

 

- 공소 강당 마련과 준본당 설정

  제 4장 공소 강당 마련과 준본당 설정


1 .공소 강당 마련을 위한 노력


1) 교구의 지원금 확보


신자들의 노력과 다양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자력으로 독립된 공소 강당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네 번째 공소집인 태권도장에서 약 1년 동안 생활하면서 신자들은 스스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마음에는 언제나 번듯한 공소 강당에 대한 소망이 있었다.

 

2) 실패로 끝난 강당 마련


1979년 11월, 극동 공소의 신자들은 교구의 지원금으로 신동아 상가 안에 80여 평의 강당을 전세로 계약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양재동 본당 구역 안이었으므로 그곳 이문근 요한 신부가 반대함으로써 해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와중에서 교구 지원금 일부가 손실되어 신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재호 회장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3) 준비 교회 발족 노력과 강당 마련


공소 신자들은 다음해인 1980년 10월 1일부터 본당 신부와 신자들의 호응아래 "천주교 서초 준비 교회" 발족을 서둘렀다. 그리고 극동 아파트 앞에 건립되던 "경복 빌딩"이 완공되기를 기다려 1980년10월 20일자로 이 빌딩 3층에 60여 평의 강당을 전세로 계약하였다. 네 번이나 공소집을 전전한 끝에 마침내 공소 강당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때 극동 공소의 신자들은 교적상으로 이미 2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첫 공소 강당을 마련한 신자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몇일 후 주일 미사가 있게 되면 신자들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재호 회장과, 오중근·이진락·이능세 형제 등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마련하여 의자부터 구비하기로 하고, 오장동 고가구점에서 우선 70여 개의 헌 의자를 미사 전날 토요일에 강당에 비치하였다. 이때 여성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나와 '의자를 닦고, 자리를 정돈하고, 또 고상도 걸고' 하여 미사를 준비하였다.


서초동 공소 신자들이 이 강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것은 10월 30일 이었다. 이날 본당의 박병윤 신부는 그 기쁨을 신자들과 함께 하고는 앞으로의 본당 설정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그 후 강주일(노렌조)과 아희정·박금서 등은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을 위해 난로를 기증하였고, 반포 본당의 사목 위원 이중조(안드레아)는 제대 공사비용을 도맡아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은 반포 본당에서 14처를 가져다 강당에 걸었고, 책상도 본당에서 남는 것을 가져다 비치하였다. 또 여성 신자들은 성물 판매대를 반포에서 가져다 강당 한쪽에 비치하고 자발적으로 판매 활동을 시작하였다.


강당에서의 주일 미사 봉헌은 12월 7일까지는 한 대만 이루어졌지만, 12월 14일부터는 3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본당의 박병윤 신부와 논현동 본당의 제2대 주임 김덕제(치릴로)신부, 그리고 반포 본당의 보좌로 재직하던 최기복(마티아)신부와 매스콤 위원회의 김정수(안드레아)신부가 미사를 집전해 주었다.


  • 「공소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본당의 박병윤 신부님께서는 '이제 좀 큰 강당을 얻어야하지 않겠느냐?'고 신자들에게 자주 말씀하셨죠. 이에 신자들이 교구청으로 관리국장 신부님을 찾아가 지원금을 빌리게 된 것입니다. 교구의 지원금을 얻게 된 신자들은 뛸뜻이 기뻤습니다. 그러므로 곧 적당한 건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강당으로 결정된 곳이 신동아 상가 안의 임대 사무실이었습니다. 그래서 200만원 보증금을 걸고 계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문제가 생겨 할수없이 이를 해약하고자 했는데, 건물주-외교인이었음-가 보증금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결국 신자들은 이를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물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이렇게 되어 강당 마련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지만, 교구측의 지원은 곧 본당 설립을 염두에 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중심지를 극동공소에 두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반포 본당에서는 이 무렵인 1980년 5월에 새 성전 축성식을 갖게 되었는데, 이 때 공소 신자들은 그 동안 모은 30만원으로 성전 중앙의 십자가를 봉헌하였다.


  • 당시 반포 본당은 설립된 지 4년이 되면서 점차 정착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웃의 양재동 본당은 1977년 10월 23일 새 성전이 축성식을 갖고 다음해 1월 제8대 주임 이문근(요한)신부를 맞이하여 본당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또 그 동안 서초동 지역의 진흥아파트, 삼익 아파트, 삼호 아파트, 은하아파트, 신동아 아파트, 우성 아파트 입주가 완료됨으로써 극동 공소의 신자 수는 부쩍 증가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서초동 남쪽과 서쪽 지역의 신자들은 대부분 양재동 본당으로, 극동 공소 인근의 북쪽 신자들은 반포 본당으로 나가고 있었다.


  • 이 무렵 서초동 지역의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교구와 박병윤 신부는 앞으로를 위해 서초동  공소 신자들에게 강당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이재호 회장을 비롯하여 오중근·이진락 등은 강당 매입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교구청을 방문하였고, 당시 관리국장으로 재임하던 김영일(발다사르)신부로부터 강당 마련 지원금으로 2천마원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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