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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공소의 설립과 초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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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ta
댓글 0건 조회 1,202회 작성일 20-06-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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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본당 설립 이전의 지역 교회
 복음의 전래와 서리풀 공소

 

2. 극동 공소의 설립과 초기 모습


1) 극동 공소의 설립


이와 같이 '서초동 공동체'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모임에서 시작되었으며, 사제의 방문을 받아 정식 공동체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바로 이 측면에서 보면, 이용선 신부가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양재동 본당의 공소가 설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곳 신자들은 공소 설립 후 몇일 만에 닥친 이해의 성탄 미사를 양재동 본당에서 봉헌하였고, 이때 신자들이 모은 봉헌금 20만원 전달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극동 아파트 지역은 사목 관할 구역 면에서 볼 때 반포 본당에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반포 본당의 초대 주임인 박병윤 토마스 신부는 서초동 공동체가 형성된 사실을 알고는 이용선 신부와 협의

하여 관할 구역을 다시 확인하였고, 이에 따라 잠시 양재동 본당에 속하였던 이곳 신자들은 반포 본당으로 교적을 옮기게 되었다.


1977년 초부터 반포 본당의 미사에 참례하게 된 극동 아파트의 신자들은 나름대로 공동체의 나눔을 위해 노력함으로서 외형적으로는 본당의 한 구역에 불과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공소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포 본당의 박병윤 신부도 이미 이곳을 방문했기 때문에 그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곳 신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1977년 1월 15일자로 서초동 공동체를 반포 본당의 '극동 공소'로 설정하였으니, 이것이 훗날 설립되는 서초동 본당의 직접적인 모체가 된 것이다.

 

2) 공소 초기의 모습
공소 설정 당일 박병윤 신부는 극동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박 엘리사벳 자매의 "미술 학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해 주었다. 신자들로서는 이것이 자신들의 구역에서 봉헌한 두 번째 미사였고, 미술학원은 첫 번째 공소집 이었다. 이처럼 극동 아파트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976년 12월 21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여 양재동 본당의 공소가 된 다음, 다음해 1월 15일에 반포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극동 공소 설립 당시 이곳 신자들은 40명(10세대) 정도였는데, 미사에 참석한 신자수는 30여 명이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하나의 추억일 뿐이기도 하지만, 이 첫 미사는 당시의 신자들에게 두고두고 기억 속에 남는 일이었다.


신자의 학원을 임시로 빌려 봉헌한 첫 미사였으므로 그들에게는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고, 학원 벽에 붙어있는 장식품들도 휘장으로 가린 다음 미사를 봉헌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내부를 장식한 성화·성물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또 난로 같은 비품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신자들이 집에 있는 난로를 가져다 사용한 후 다시 집으로 가져가야만 했다. 초대 공소 회장인 이재호(바오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추운 겨울이었으니 마루 바닥에 앉아있는 신자들이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생각한 끝에 우선 집에 있는 양탄자를 잘라다 방석 대용으로 썼지요. 오중근 형제와 제가 우선 급한 대로 집에서 난로를 가져오고, 또 한정림·손영화·김경희·양수자 자매 등은 미사 전에 아파트 이곳 저곳에 알림장을 만들어 붙여 '이곳에서도 미사가 있으니 천주교 신자들은 모이라'고 알렸지요.


또 첫 미사 때부터 박 신부님께서 사용하던 제의·성작 가방을 지금까지 성당에 보관해 오고 있는데, 이 가방을 신자들 집에 가져다 놓았다가 일요일 아침이면 미리 가져다 미사 준비를 하곤 했습니다. 그때 저나 오중근 형제 등 몇몇이 한 3년 동안 이 가방을 나르느라 고생도 했는데, 지금은 이를 기쁨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3) 공소 회장단 구성과 주일학교
박병윤 신부는 공소 설정과 함께 다음과 같이 공소 회장단을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첫 미사를 봉헌한 후 신자들은 즉시 회장단을 중심으로 회합을 갖고 나름대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 극동 공소의 초대 회장단 >
·회  장 : 이재호(바오로)
·부회장 : 오중근(요한), 박 엘리사벳
·대표 사목장 : 한정림(루시아)
·사목장 : 양수자(요셉피나), 손영화(안나)

 

첫 미사 끝난 뒤부터 신자들은 우선 어린이들을 위한 교리교육을 실시하였다. 

정식으로 주일학교를 개설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자들은 적극적으로 여기에 호응하였다. 김경희(글라라)는 이에 대해 "당시 공소에는 7, 8명의 어린이들이 있었는데, 박병윤 신부가 반포 본당에서 데려온 대학생 교리 교사가 이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당시 공소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를 한 반포 본당의 신자는 처음에 한 명이었다가 나중에는 두 명이 되었다.


이처럼 극동 공소에서는 첫 공소집이 된 미술 학원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교리 교육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공소집은 주일에만 임시로 빌려쓰는 것이었으므로 초기의 신자들은 이후 여러 차례 미사 장소를 옮겨야 했으며, 그 와중에서 갑자기 새 장소를 구해야 하는 애로를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신앙 자체는 더욱 성숙해져 갔고, 공소도 나름대로 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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