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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역사

서리풀 공소의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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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ta
댓글 0건 조회 98회 작성일 20-06-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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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본당 설립 이전의 지역 교회
 복음의 전래와 서리풀 공소

 

- 서초동 지역의 복음 전래

 

3) 서리풀 공소의 변모


서리풀 공소의 처음 공소집은 명달리, 즉 지금의 지하철 2호선 서초역 지상의 향나무 인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초대 김 회장의 집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대는 강남 지역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서리풀의 신자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던 곳으로, 마을은 주변 야산에 둘러싸여 있었고 논과 밭이 대부분이었다.


그 후 1927년에 백동 본당(지금의 혜화동 본당)이 설립되면서 지금의 강남 일대는 소속 본당의 변화가 있게 되었다. 

즉 동부 지역에 있던 숫골과 가나골 공소는 신설된 백동 본당의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되었지만, 서리풀과 게리 공소는 

그대로 약현 본당 소속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약현 본당은 1917년 4월 초대 두세 신부가 사망함에 따라 

제2대 신부로 비에모(Villemot)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1926년에는 비에모 신부가 명동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한국인 김윤근 요셉 신부가 제3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 결과 서리풀 공소의 신자들은 비에모 신부에 이어 김윤근 신부의 방문을 받고 춘추 판공성사를 보게 되었다. 

김 신부는 이후 1942년에 은퇴하기까지 16년간을 약현 본당에 재임하였는데, 그 동안 서리풀 공소는 초대 김 회장이 

사망함에 따라 그의 아들인 김으석(벨라도) 회장이 제2대 회장으로 공소를 돌보게 되었다. 기존의 "서리풀 공소"라는 

명칭이 "서초리 공소"로 변모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편 당시 서초리에는 경성교구 유지 재단 명의의 '교회 공동 묘지'가 위치해 있었다. 이 묘지는 현재의 테헤란로 4거리 

부근과 제일생명 빌딩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서울교구 최초의 교회 묘지로, 1910년 8월 25일에 약현 본당의 신자들이 

조성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928년 8월 25일자로 그 명의가 서울교구로 이전되면서 강북과 강남의 신자들은 물로 박해 시대의 순교자 시신도 이곳으로 이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되면서 폐쇄되어

야만 했다. 처음 이 묘지를 관리한 신자는 정창규(안드레아) 회장이었으며, 그는 1930년대 초에 이르러 지금의 반포와 

논현 지역의 신자들을 중심으로 '언구비 공소'를 설립하였다.


언구비 공소가 설립되면서 지금의 강남 지역은 공소의 관할 구역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즉 교회 묘지를 중심으로 서쪽 

지역은 서초리 공소(지금의 서초동·방배동 지역), 북쪽은 언구비 공소(지금의 반포동·논현동 지역) 남쪽은 양재리 공소

(지금의 양재동·역삼동 지역), 동쪽은 청담리 공소(지금의 청담동·압구정동 공소) 등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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