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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공소의 설립과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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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ta
댓글 0건 조회 95회 작성일 20-06-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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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본당 설립 이전의 지역 교회
 복음의 전래와 서리풀 공소

 

2. 서리풀 공소의 설립과 변모


1) 서리풀 공소의 설립 과정


"서리풀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1년으로 당시의 신자 수는 모두 33명이었다. 

이에 앞서 약현 본당의 두세 신부는 자신의 사목 구역 안에 새로 몇 군데의 공소를 설립하고자 하였고, 한강 이남 지역에는 우선 1891년에 '동지기 공소'(지금의 동작구 동작동 지역)을 설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7년에는 다시 변두리 지역 즉 경기도 남부·서부를 미리 둘러보고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교구장에게 보고하였다.


「현재 본인이 오로지 소망하는 것은 서울에서 떨어진 곳(경기도 지역)에 한 10리쯤 간격으로 몇 군데 공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교인들 가운데서 고립되어 살고있는 몇몇 신자들이 주일이면 그들을 돌보게 될 전교회장과 함께 모일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남부와 서부에서는 일이 잘 되었으니, 이제 북부와 동부가 남았습니다.」


이처럼 두세 신부가 외교인 가운데 살고 있는 신자들의 집회소(공소집)를 마련해 주고자 한 것은 여러 곳에서 발생하던 敎案 때문이었다. 이교안은 천주교인들과 일반 민중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침해 사건을 말하는데, 박해가 끝나고 1896년에 韓佛條約이 체결된 이후부터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1905년 사이에 특히 심하였다. 그러므로 두세 신부는 각처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은 보호하기 위해 변두리 지역의 공소집 설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의도 아래서 그는 지금의 강남 지역에도 공소를 설정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맨 먼저 이루어진 것이 1901년에 설립된 서리풀 공소였다. 

 

이처럼 서리풀 지역이 본당 신부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우선 기존의 동지기 공소만으로는 서초리·방배리·양재리·역삼리 등지에 퍼져 있는 신자들을 돌보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서초리·양재리 지역의 신자수가 증가하고 있었고, 또 이들이 신앙 생활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따로 공소 하나를 설립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2) 서리풀 공소의 현황


서리풀 공소의 처음의 신자수는 33명에 불과했지만 이듬해에는 그 두 배가되는 65명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처럼 신자수가 급증한 이유는 첫해 공소가 설정된 것을 모르고 있던 이웃의 양재리·방배리 신자들이 곧 이곳을 방문

하여 공소 예절에 참석하게 된 때문이라 하겠다.


서리풀 공소에서는 해마다 몇 명씩 새 신자를 탄생시키고 있었고, 예비신자도 언제나 3 - 7 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1년과 1912년을 고비로 하여 신자수가 감소되다가 1924년 무렵에서야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또 1912년 이후 약 10년 동안은 예비자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1910년 무렵에는 이미 강남 지역 여러 곳에 공소가 설립되어 있었다.

1904년에는 '가나골 공소'(지금의 송파구 가락동 지역)가 설립되었고, 1908년에는 숫골 교우촌이 정식 '숫골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1912년에는 '게리 공소'(지금의 서초구 양재동 지역)가 설립되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중 게리 공소는 서리풀 공소에서 분리된 것이 확실하다.


1912년 이후 서리풀 공소의 신자수가 감소한 원인은 우선 게리 공소의 분할에 원인이 있었다. 

또 그 원인은 1910년의 한일합병 이후 경제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이에 따라 신자들이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 한 데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서리풀 공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가 겪던 어려움이

었다. 시류에 편승하여 천주교 신자들도 간도(間島)나 하와이·일본 등지로 이민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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