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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리와 서리풀 - 조선 시대의 서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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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ta
댓글 0건 조회 212회 작성일 20-07-07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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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본당 설립 이전의 지역 교회
 서초동 지역의 변모

     1서초리와 서리풀

 

1) 조선 시대의 서초리


현재 서초동 본당의 사목 관할 구역은 조선시대까지 경기도 과천현(果川懸) 동면(東面)에 속해 있었다. 여기에는 행정 구역의 가장 아래 조직인 서초리(瑞草理)·명달리(明達理)·우면리(牛面理)·방배리(方背理)·반포리(盤浦理) 등이 있었는데, 이 리명(理名)들이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현재의 동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여지도서》(與地圖書)를 살펴보면, 동면의 '서초리'에는 그 중심 마을인 서초리(서리풀)이 현재의 삼풍 아파트 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 이웃의 대촌(大村, 엄나무골)이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쪽에 있는 여원사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장안말과 정곡 마을이 지금의 삼풍 아파트 앞쪽과 대법원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중 장안말은 조선 초기부터 있던 부락으로 현재의 대법원과 삼풍 아파트 사이에 있던 '장안사'의 아랫마을이란 데서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 장안사는 건금산(乾金山)이란 야산 정상의 매봉재 기슭에 있던 절이었다.


행정 구역상 서초리에 변화가 있게 된 것은 일제 시대 초기인 1914년이었다. 즉 이해 일제 총독부에서 경기도의 행정 구역을 일제히 조정하면서 과천, 금천(지금의 시흥 지역), 안산 등 3개 지역을 '시흥군'으로 통합하였고, 이에 따라 서초리, 명달리, 우면리, 반포리, 등은 행정 구역상으로 시흥군 신동면에 속하게 되었다.


2) 서리풀의 유래


본래 서초동의 옛 이름은 "서리풀"이었다. 이 지역에 서리풀이란 이름이 붙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 영조 때 당파 싸움에서 밀려나 유배형을 받은 이양복이 유배를 가기 전에 아들 경운으로 하여금 고향인 장안말에 가서 가명을 쓰고 은둔하면서 조상의 묘를 돌보도록 하였다. 이양복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12대 손으로 뼈대 있는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조상의 무덤을 매우 중시하던 터였다. 부친의 말대로 이경운은 장안말에 살면서 선산을 돌보았는데, 40여 세가 되지 못했다. 당파에서 밀려난 그의 진안으로서는 아들을 얻어 선산을 돌보고 집안의 명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는 조상들의 무덤 앞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는데 그 마지막 날에 그의 정성이 효험을 얻게 되었다.


이날은 몹시 눈이 많이 내렸으나 그는 날씨에 관계없이 마지막 기도를 정성스럽게 드렸다. 바로 그때 백발 노인이 나타나 "나는 묘의 주인으로 너의 정성이 지극함을 보고 소원을 들어주기고 하였다. 내가 보내준 호랑이를 타고 저 앞의 안산으로 가면 눈 속에서도 푸른 자태를 자랑하는 설중록초(雪中綠草)가 있을 터이니, 이것을 다려먹으면 효험이 있을 것이다."하고 사라졌다. 이경운은 그 말대로 호랑이를 타고 안산으로 가서 그 풀을 얻게 되었고, 이를 복용한 후에는 자손이 번창하여 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전해오는 이야기에 맞추어 눈 속에서도 자라는 효험 있는 풀의 마을이라 하여 이름을 "설이초리"(雪裏草理)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서리풀이" 즉 상초리(霜草理)로  바뀌었다가 다시 서초리로 변모되었으며, 장안말 뿐만 아니라 이 지역 일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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